조선 최대의 스캔들 — 어우동, 한양을 뒤집어놓은 종실가의 며느리
1480년, 한양을 발칵 뒤집은 이름 하나
1480년(성종 11년) 가을, 한양의 사대부와 종친 사회가 통째로 흔들렸습니다.
의금부 국문장에 줄줄이 끌려 나온 이름들 — 종친, 고위 관료, 젊은 무관, 심지어 왕의 친척까지.
그리고 그 모든 남자들의 입에서 공통으로 흘러나온 한 여자의 이름이 있었습니다.
박어을우동(朴於乙于同), 우리가 아는 그 이름 어우동입니다.
조선 500년을 통틀어 이만큼 시끄러웠던 스캔들은 없었습니다.
그리고 이만큼 한쪽에만 가혹했던 판결도 없었습니다.
그녀는 평민이 아니었다 — 왕가의 며느리
흔히 어우동을 '기생'으로 오해하지만, 사실 그녀의 출발점은 한양에서 가장 높은 곳이었습니다.
아버지는 승문원 지사를 지낸 박윤창(朴允昌). 외교 문서를 다루던 엘리트 관료 집안의 딸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녀가 시집간 곳은 세종의 형 효령대군의 손자, 태강수 이동(泰江守 李仝).
즉 어우동은 왕실 종친의 부인, 종2품 신분의 귀부인이었습니다.
이 사실이 중요한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사건이 터졌을 때 조선 사회가 받은 충격의 크기가 그녀의 신분에서 나왔기 때문입니다.
시장 바닥의 여인이 아니라, 궁궐 가까이에서 비단옷 입고 지내던 종실가의 며느리가 일으킨 일이었으니까요.
시작은 남편의 외도였다
『성종실록』은 이 사건의 발단을 의외의 장면에서 시작합니다.
남편 태강수 이동이 **은장이(銀匠, 은세공 장인)**를 집에 불러 일을 시켰는데, 그 과정에서 어우동이 그 은장이와 가까워졌다는 이유로 — 또는 그렇게 의심했다는 이유로 — 남편이 그녀를 친정으로 내쫓아버렸습니다.
소박입니다.
그런데 기록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묘합니다.
태강수 본인이 이미 다른 첩에게 빠져 있었고, 어우동을 내치기 위한 명분으로 은장이 일을 부풀렸다는 정황이 곳곳에 깔려 있습니다.
실록을 편찬한 신하들조차 "태강수의 행실이 먼저 바르지 못했다"는 식으로 슬쩍 흘리고 지나갑니다.
문제는, 조선에서 소박맞은 종실가 며느리에게 남은 길이 거의 없었다는 것입니다.
친정으로 돌아가도 받아줄 자리가 좁았고, 재혼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고, 사회적으로는 이미 '결함 있는 여인'이 되어버린 상태였습니다.
한양 사교계의 중심으로
집을 나온 어우동은 한양에서 새로운 인연들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실록에 이름이 오른 남자들의 면면이 그야말로 화려합니다.
종친 중에서는 방산수 이난(方山守 李瀾), 수산수 이기(守山守 李驥) 같은 왕실 인물들.
관료 중에는 병조판서까지 지낸 어유소(魚有沼), 훗날 영의정에 오르는 **노공필(盧公弼)**의 이름도 거론됐습니다.
그 외에도 젊은 무관, 서리, 심지어 노비까지 — 신분의 상하를 가리지 않고 이름이 등장합니다.
특히 충격적이었던 것은 방산수 이난과의 관계였습니다.
방산수는 어우동의 남편 태강수와 같은 효령대군의 후손, 그러니까 시댁 친척이었습니다.
조선의 윤리 기준으로는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관계였습니다.
방산수는 한술 더 떠 어우동의 팔뚝에 자기 이름을 **먹으로 새겼다(文身)**고 실록은 기록합니다.
600년 전 한양 한복판의 커플 타투인 셈인데, 이것이 결국 결정적인 물증이 되어 사건이 터지게 됩니다.
처형대 위의 한 사람
1480년 10월, 의금부의 국문이 시작됩니다.
조정은 발칵 뒤집혔고, 성종은 직접 이 사건을 챙겼습니다.
그런데 판결이 묘하게 어그러집니다.
어우동 — 교형(絞刑, 교수형).
그리고 같이 끌려 들어온 남자들은 어떻게 됐을까요.
방산수 이난은 유배. 수산수 이기도 유배.
어유소·노공필을 비롯한 거물들 다수는 증거불충분 또는 무혐의로 풀려났습니다.
일부는 가벼운 파직에 그쳤고, 시간이 지나자 다시 관직에 복귀했습니다.
조정 안에서도 "법에 따르면 어우동의 죄가 사형까지는 아니다"라는 반론이 있었습니다.
『대명률』 기준으로도 간통죄에 사형은 과한 처벌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성종은 **"풍속을 바로잡으려면 본보기가 필요하다"**는 논리로 사형을 밀어붙였습니다.
본보기.
다시 말해, 조선 사회의 흔들리는 윤리를 다잡기 위해 누군가 한 명은 죽어야 했고, 그 한 명이 어우동이었다는 뜻입니다.
어우동은 정말 '음란한 여인'이었을까
후대의 기록과 야사는 어우동을 점점 더 자극적으로 그려냅니다.
조선 후기로 갈수록 그녀는 '음란의 화신', '요부의 대명사'가 되어갔습니다.
1985년 영화 「어우동」이 흥행하면서 그 이미지는 대중문화에 박제되다시피 했습니다.
그러나 1차 사료인 『성종실록』을 차분히 읽으면 그림이 좀 다릅니다.
먼저 그녀를 내친 것은 남편이었습니다.
둘째, 그녀가 만난 남자들은 대부분 자발적으로 접근한 권력자들이었습니다.
셋째, 같은 행위를 한 남자들은 살아남았고, 여자만 죽었습니다.
조선은 이 사건을 통해 두 가지를 동시에 처리했습니다.
흔들리던 사대부 윤리에 본보기를 세우고, 동시에 연루된 권력자들의 이름을 어우동이라는 이름 뒤에 묻어버린 것입니다.
죽은 자는 말이 없으니까요.
600년 뒤, 우리가 다시 읽는 이름
흥미로운 사실 하나.
'어우동'은 본명이 아닙니다.
본명은 박씨 가문의 어떤 이름이었을 텐데, 가문이 그녀를 족보에서 지워버리면서 본명마저 사라졌습니다.
남은 것은 '어을우동(於乙于同)'이라는 별칭뿐.
한 인간의 이름조차 지워버린 것이 조선의 처벌 방식이었습니다.
오늘날 그녀의 이야기는 단순한 '조선판 막장 스캔들'이 아니라, 한 사회가 여성에게 어떤 기준을 들이댔고, 같은 잘못 앞에서 누구를 살리고 누구를 죽였는가에 대한 기록으로 다시 읽힙니다.
한양 어딘가, 1480년 가을의 형장.
거기서 사라진 한 여자의 이름이 600년이 지난 지금까지 회자되는 것은 — 어쩌면 그 판결이 끝내 공정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가 본능적으로 알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 항목 | 내용 |
|---|---|
| 본명 | 박씨 (가문에서 삭제, 별칭 '어을우동'으로 전함) |
| 생몰연도 | 미상 ~ 1480년 |
| 신분 | 사대부가 출신, 종실 태강수 이동의 부인 |
| 주요 사건 | 1480년(성종 11년) 간통 사건, 교형 처형 |
| 연루 인물 | 방산수 이난, 수산수 이기, 어유소, 노공필 등 |
| 처벌 | 어우동만 사형, 남성들은 유배·파직·무혐의 |
| 서울 관련 | 의금부 터 (현 종로구 공평동 일대) |
| 교통 | 지하철 1호선 종각역 1번 출구 (도보 3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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