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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뒤주에서 죽었다 — 혜경궁 홍씨, 60년 침묵 끝에 붓을 든 여자

|기록: 서울역사 에디터
사도세자가 뒤주에서 죽던 그 여름, 그의 아내는 옆방에 있었습니다. 60년 뒤 혜경궁 홍씨가 한중록에 남긴 진짜 이야기.

남편이 뒤주에서 죽었다 — 혜경궁 홍씨, 60년 침묵 끝에 붓을 든 여자

1762년 윤5월, 한양의 한여름.

창경궁 문정전 앞마당에 뒤주 하나가 놓였습니다. 그 안에 들어간 사람은 조선의 세자. 뒤주를 닫으라고 명령한 사람은 그의 친아버지인 왕. 그리고 그 모든 광경을 옆에서 지켜봐야 했던 한 여자가 있었습니다.

세자의 아내, 혜경궁 홍씨입니다.

남편이 8일 동안 뒤주 안에서 굶어 죽어가는 동안, 그녀는 같은 궁 안에 있었습니다. 도와줄 수도, 말릴 수도, 울부짖을 수도 없었습니다. 그때 그녀의 나이 스물여덟. 열 살 된 아들(훗날의 정조)이 있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보통 '사도세자' 또는 '영조'의 이야기로 기억됩니다. 그런데 그 사건의 가장 가까운 자리에서 모든 것을 본 사람은, 따로 있었습니다.


열 살에 세자빈이 되다

혜경궁 홍씨는 1735년 한양 반송방 거평동(지금의 서대문구 충정로 일대)에서 태어났습니다. 아버지 홍봉한은 풍산 홍씨 명문가 출신이었지만, 어린 시절 집안은 그리 풍족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다 열 살이 되던 해, 그녀의 인생이 통째로 바뀝니다. 1744년 세자빈 간택에 뽑힌 것입니다.

당시 세자는 사도세자, 영조의 외아들이었습니다. 동갑이었던 두 아이가 함께 가례를 올렸고, 혜경궁은 그 길로 친정을 떠나 창경궁에 들어갑니다.

열 살짜리가 시집을 갔다는 것은, 사실상 궁궐이 그녀의 인생 전부가 되었다는 뜻입니다. 그녀가 본 모든 것, 들은 모든 것, 견딘 모든 것이 그 안에서 일어났습니다.


옆에서 본 남편의 광기

사도세자는 처음부터 이상했던 사람이 아닙니다.

총명했고, 무예에 뛰어났고, 한때는 영조가 자랑스러워하던 세자였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그의 정신이 무너지기 시작했습니다. 옷을 입으면 살이 타들어가는 것 같다며 발작했고(의대증), 시중드는 내관과 궁녀를 죽이는 일이 늘었습니다. 한밤중에 칼을 들고 궁궐을 헤매기도 했습니다.

이 모든 것을, 혜경궁은 같은 침전에서 지켜봤습니다.

훗날 그녀가 쓴 한중록에는 남편의 발작과 폭력 앞에서 두려움에 떨었던 대목이 곳곳에 나옵니다. 옷을 입은 채로 자야 했고, 언제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몰라 마음을 놓을 수 없었던 날들의 기록입니다.

이 결혼은 사랑이 아니었습니다. 공포였습니다.

그런데도 그녀는 도망갈 수 없었습니다. 세자빈은 자리에서 내려올 수 있는 직책이 아니었습니다. 아들도 있었습니다. 그녀는 그 자리에서, 매일 살아남는 일을 해야 했습니다.


뒤주가 닫히던 날

1762년 윤5월 13일.

영조가 사도세자에게 자결을 명령했습니다. 세자가 응하지 않자, 뒤주를 가져오게 했습니다. 영조의 명령으로 뒤주가 닫혔습니다.

이 장면에서 혜경궁은 어디에 있었을까요.

한중록에 따르면, 그녀는 그 직전까지 친정 쪽에 사람을 보내 어떻게든 사태를 막아보려 했습니다. 그러나 친정아버지 홍봉한은 노론의 영수였고, 사도세자를 둘러싼 정치적 갈등의 한복판에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친정과 시아버지가 결국 같은 결말을 향해 가고 있었던 셈입니다.

뒤주가 닫힌 뒤, 혜경궁은 친정으로 잠시 보내졌습니다. 열 살 된 아들을 데리고서. 8일 뒤 사도세자는 뒤주 안에서 죽었습니다.

그녀의 나이 스물여덟. 그날 그녀는 남편을 잃었고, 동시에 친정과 시아버지가 한 흐름이 되어 남편의 죽음을 향해 가는 광경을 본 사람이 되었습니다.


아들이 왕이 되다 — 그러나 또다시 외줄타기

남편이 죽은 뒤, 혜경궁의 삶은 다시 시작됩니다.

아들이 세손이 되었고, 1776년 영조가 죽으면서 왕위에 올랐습니다. 그가 정조입니다.

이쯤 되면 혜경궁의 삶이 평온해질 법도 했습니다. 아들이 왕이 됐으니까요. 그러나 그렇지 않았습니다.

정조는 아버지의 죽음에 관련된 노론 세력과 평생 정치적으로 대립했고, 혜경궁의 친정인 풍산 홍씨 가문은 그 노론의 한 축이었습니다. 즉 그녀의 아들은 그녀의 친정과 정치적으로 대립하는 관계가 된 것입니다.

남편의 죽음을 둘러싼 사람들이 친정 식구들과 가까웠고, 그 친정과 거리를 두려는 사람이 아들이었습니다. 그녀는 평생 누구의 편에도 온전히 설 수 없었습니다.

정조는 어머니를 극진히 모셨습니다. 수원 화성을 새로 짓고, 그곳까지 어머니를 모시는 대규모 행차를 여러 차례 거행했습니다. 그러나 어머니가 친정 편을 들면 단호하게 거리를 두기도 했습니다.

혜경궁은 평생 이 줄타기를 했습니다.


60년 침묵 끝에 붓을 들다

1795년, 혜경궁은 회갑을 맞이합니다. 그 해부터 그녀는 글을 쓰기 시작했습니다.

한문이 아닌 한글로. 자기 손으로 직접.

조선의 여성, 그것도 왕실의 가장 높은 자리에 있는 여성이 자기 인생을 글로 남긴다는 것은 전례 없는 일이었습니다. 그녀는 무엇을 쓸지 정확히 알고 있었습니다.

남편이 어떻게 죽었는지. 친정이 어떻게 했는지. 시아버지 영조가 어떤 사람이었는지. 아들 정조가 자신을 어떻게 대했는지.

이 글이 한중록입니다.

한중록은 1795년 첫 편을 시작으로 1801년에서 1805년 사이에 걸쳐 여러 편이 더해져 완성됐습니다. 처음에는 친정 조카 홍수영의 부탁으로 자신의 일생을 회고하며 시작했지만, 결국 그녀는 조선 왕실에서 가장 무거운 사건의 가장 가까운 증언자가 되었습니다.

흥미로운 것은, 한중록이 단순한 회고록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그 안에는 친정의 입장을 옹호하는 대목이 적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학자들은 한중록을 회고록인 동시에 친정을 변호하는 글로 읽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것조차도, 한 여자가 수십 년 동안 삼켜온 말을 토해낸 결과였습니다. 변명이든 진실이든, 그녀는 마침내 자기 입으로 말을 했습니다.


한양에서 가장 많이 본 여자

혜경궁 홍씨는 1815년(음력) 향년 80세로 세상을 떠났습니다. 시아버지 영조, 아들 정조, 손자 순조 — 세 명의 왕을 본 사람이었습니다.

조선의 어떤 사관도, 어떤 학자도, 어떤 신하도 그녀만큼 가까이에서 보지 못했습니다.

영조가 며느리에게 어떻게 말했는지. 사도세자가 어떤 밤을 보냈는지. 정조가 어머니 앞에서 어떤 표정을 지었는지. 노론 대신들이 궁에 들어와 어떤 인사를 했는지. 이 모든 것을 본 사람은 그녀 한 명뿐이었습니다.

남자들이 정사를 쓰고, 실록을 쓰고, 야사를 쓰는 동안 — 혜경궁은 침묵했습니다. 그러다 회갑이 지나서야, 자기가 본 것을 자기 글로 적기 시작했습니다.

조선의 500년 동안 여자가 자기 이름으로 남긴 글은 손에 꼽힙니다. 그중 가장 길고, 가장 무겁고, 가장 가까운 거리에서 권력의 한복판을 본 글이 한중록입니다.


창경궁에 가면

지금도 창경궁에 가면 문정전이 있습니다. 사도세자가 뒤주 안에서 죽은 바로 그 자리입니다.

관람객들은 대부분 그곳을 지나치며 사도세자를 떠올립니다. 그러나 그 마당 어딘가에는, 8일 동안 옆방에서 모든 소리를 들어야 했던 한 여자도 있었습니다.

그녀가 60년 뒤 그날을 어떻게 적었는지를 생각하면, 창경궁의 봄날도 조금은 다르게 보입니다.

항목 내용
본명 혜경궁 홍씨 (1735~1815, 음력 기준)
출신 한양 반송방 거평동(현 서대문구 충정로 일대), 풍산 홍씨 가문
결혼 1744년(10세), 사도세자(동갑)와 가례
비극 1762년 윤5월, 남편 사도세자 뒤주에서 사망
아들 정조 (조선 22대 왕, 1752년생)
대표작 한중록 (1795년~1805년경 한글로 집필, 조카 홍수영의 부탁에서 시작)
의의 조선 왕실 여성이 직접 쓴 가장 긴 회고록
관련 장소 창경궁 문정전 (사건 현장), 수원 화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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